도시가 재미있으면 사람들은 모인다
이준익 감독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장 중의 한 명입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2005) 등 여러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 해 온 그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인물과 현상을 유심히 관찰해야만 하는 감독이라는 직업의 특성은 호기심이 많은 이 감독에게 잘 부합하는데요. 그의 작품에 드러난 인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 시대를 꿰뚫는 통찰은 장르를 많이 연출 해 온 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추하며 대중과 공명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여러 도시뿐만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도시를 누비며 촬영해 온 이준익 감독에게 도시에 대해 물었습니다. 차기작 촬영을 해남과 가까운 강진, 비금도 등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더 반가운 마음에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솔라시도 블로그 운영진과 인터뷰를 하는 이준익 감독
Q. 최근작 ‘변산’은 전라도 변산을 무대로 촬영했습니다. 특정 지역을 영화의 배경으로 한 계기가 있었나요?
“현대사회에서 도시화는 가속화 되고 있다고 봐요. 흔히 얘기하는 지방, 시골이 점점 소외되고 있는 거죠. 영화의 무대도 도시에 집중되다 보니 지방은 점점 영화 바깥으로 밀리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지방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상업적으로 불리하더라도 외진 곳에 카메라를 비추는 것이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변산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이죠.”
영화 '변산' 포스터
Q. ‘변산’은 학수(박정민)의 삶을 통해 희망을 찾아가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을 연출하면서 감독님도 인물에 이입이 됐을 텐데요, 청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청춘입니다(하하). 사실 시대에 따라 청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게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청춘이라고 하면 뭔가 낭만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내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세상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의지가 강했죠. 희망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요즘 청춘은 너무 각박한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아요.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삶의 편차가 너무 큰 거죠. ‘을의 전쟁’, ‘청춘의 외침’이 더 많아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궁핍함을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거에요. 물론 지금의 청춘도 잘 살아 보려는 의지가 강하겠지만, 시대에 억눌려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기성세대로서 안타까운 일이죠. 저는 영화 감독이니까, 영화를 통해서 청춘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청춘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Q. 대중매체로서 영화는 많은 이들과 공감할 수 있고, 또 시대적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독으로서, 영화가 사회에 어떤 변화를 미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영화를 비롯해 미술, 건축 등 많은 문화/예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효과 중의 하나는 공감 능력의 확장이라고 봐요. 최근에 세대 간 갈등, 젠더 간 갈등 등 계층과 신분을 막론하고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만 갈등을 해소하려고 한다면 다른 입장을 가진 쪽에서 반대 논리를 개발하면서 갈등이 더 심화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하지만 영화는 교조적으로 대중을 대하지 않아요. 가르치려 하지 않다는 뜻이죠. 그래서 대중도 영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요. 한 편의 영화가 사회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사례는 너무 많잖아요. 결국 영화는 세상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한 번 더 들여다 보게 되는 생각의 전환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감독님은 작품 촬영을 위해 국내외 다양한 도시를 다녔는데요, 도시에 대한 여러 인상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만약 감독님이 MP(Master Planner)가 돼 도시 계획을 총괄한다면, 어떤 도시를 짓고 싶으신가요?
“도시가 갖춰야 할 여러 기능적, 사회적 기반 조성은 도시 전문가들의 영역이니 크게 언급할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영화감독의 관점에서 이상적인 도시를 생각한다면, 도시의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재미’라고 생각해요. 즉, 재미있는 도시가 돼야 한다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재미’는 크게 두 가지의 방향으로 뻗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생산적 재미와 소비적 재미. 즉,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뤄가면서 재미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발달 시켜야 하는 거죠. 단순히 쇼핑몰을 짓고, 문화 시설을 짓는 개념이 아니에요.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베이징의 798예술구처럼 예술가들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고 대중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예술의)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뤄지는 도시가 정말 재미있는 도시입니다.”
Q. 도시에 대한 감독님의 견해/관점에서 솔라시도가 고민해야 할 도시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솔라시도가 다른 도시와 차별적인 특색을 갖기 위해서는 해남이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 즉 자연 환경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럽 지중해 남부에 있는 소도시에 가면, 자연 환경이 너무 뛰어나서 그 자체가 매력적인 곳이 많아요. 해남이 위치한 남해도 바다, 강, 숲 등 수려한 자연환경 안에서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제공한다면 종래의 도시들과 다른 특색을 가질 수 있다고 봐요. 자연 환경이 뛰어난 대지 위에 짓는 도시는, 산업 도시들과는 철학적으로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거죠.”
Q. 솔라시도처럼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진다면, 서울 등 수도권의 도시 과밀화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습니다. 특히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젊은 세대의 도시 유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텐데요.
“청년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원하는 방식은 좋은 접근 같아요. 다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거나 공장 같은 생산 시설을 짓는 전근대적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청년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도시에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자국민만 유입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까지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도시 안에서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주는 것이죠. 젊은이들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외부로 확장해갈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Q. 귀농/귀촌 인구가 51만 명을 돌파(2017년 기준) 하는 등 최근 도시를 떠나 농촌에 정착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인데요. 특히 청년들의 도시 이탈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봐요. 사실 제가 젊었을 때는 미래를 주체적으로 설계하기에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했고, 그 정보마저 왜곡 된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에 나를 끼어 맞춰 살아 온 세대였죠. 하지만 요즘에는 원하는 정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구할 수 있고, 그 정보를 본인에게 맞춰 가공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청춘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된 거죠. 특히 SNS가 발달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본인의 삶을 꾸미고, 이끌어 나가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대한민국 역사상 청춘들이 이렇게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건 아마 처음인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솔라시도에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간은 지루함을 못 견디는 부류입니다. 지루하면 못 참는 거죠(웃음). 그래서 도시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캐나다는 지루한 천국, 대한민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재미는 있지만, 지옥 같은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을 빗댄 표현인데요. 대한민국이 ‘재미있는 천국’이 될 수 있도록, 솔라시도가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면 좋을 것 같아요.”